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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아내

감사 시즌, 그리고 첫 사인오프

by 연우아빠45 2025. 8. 14.

"You'll be leading the audit for this client."

매니저가 9월에 이렇게 말했을 때, 귀를 의심했어요. 리드? 저요? 입사 1년 반밖에 안 됐는데? 한국에서는 시니어 매니저였지만, 여기서는 그냥 스태프인데.

클라이언트는 작은 제조업체. 연 매출 5천만 불 정도. 한국 기준으로는 중소기업이죠. 그래도 미국에서 처음으로 제가 리드하는 감사예요. 떨렸어요.

팀 미팅 첫날. 저 포함해서 3. 신입 스태프 둘이 저를 보고 있어요. 뭘 기대하는 눈빛. "So... let's start with planning"이라고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떨리더라고요. 한국에서는 팀원 10명 이끌었는데.

Planning memo 작성하는데 막막했어요. Risk assessment를 영어로 써야 하는데, 한국에서 쓰던 표현들이 영어로 뭔지 모르겠어요. "중요성의 관점에서 볼 때"를 영어로 어떻게 쓰죠? 구글 번역기와 친해지는 시간.

클라이언트 미팅 날. CFO가 저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요. 50? "So you're the lead auditor?"라고 물어보는데, 약간 의심스러운 눈빛. "Yes, I am"이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저도 자신 없어요'라고 생각했죠.

인벤토리 카운트 날이 왔어요. 새벽 6시 창고 집합. 한국에서도 많이 해봤지만, 여기는 스케일이 달라요. 창고가 축구장만 해요. 포크리프트가 쌩쌩 지나다니고. 안전모 쓰고 돌아다니는데, 신입 스태프가 "What should we do?"라고 물어요. 저도 모르겠는데.

창고 매니저가 빠른 영어로 뭐라고 설명하는데, 반도 못 알아들었어요. "Could you speak slowly?"라고 했더니 짜증 내는 표정. 그래도 천천히 다시 설명해줬어요. Cycle count라는 시스템을 쓴대요. 한국의 전수조사와는 달라요.

샘플링하면서 실수 했어요. 단위를 잘못 봐서 수량이 100배 차이 났어요. 신입 스태프가 "This doesn't look right"라고 지적해줬어요. 신입한테 지적받다니. "Good catch"라고 쿨하게 넘어갔지만, 얼굴이 빨개졌어요.

Substantive testing 시작했는데, 미국 회계 기준이 한국이랑 미묘하게 달라요. Revenue recognition은 비슷한데, 적용이 달라요. 매니저한테 확인하러 갔더니 "You should know this"라고. 맞아요, 알아야 하는데 모르겠어요.

어느 날 클라이언트 회계 담당자가 "Your English is getting better"라고 했어요.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Thank you"라고 했지만, '원래도 나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Working paper 리뷰하는데, 신입 스태프가 쓴 영어가 저보다 나아요. 당연하겠지만. 문법 고치면서 배워요. "Pursuant to"라는 표현, "In accordance with"라는 표현. 한국에서는 "에 따라"만 쓰면 됐는데.

11월 말, 필드워크 마지막 날. CFO "How did it go?"라고 물어요. "We found some minor issues, but overall clean"이라고 대답했어요. "Minor issues"가 사실 꽤 있었지만, 첫 감사니까 diplomatic하게.

리포트 드래프팅이 진짜 고역이었어요. Opinion letter 쓰는데, 한국 감사보고서랑 형식이 완전 달라요. 매니저가 빨간 펜으로 수정한 게 반이에요. "This is not how we write it"라고. 그럼 어떻게 쓰는데요?

12월 초, 파트너 리뷰. 파트너실 들어가는데 다리가 떨렸어요. 한국에서는 파트너들이랑 편하게 얘기했는데, 여기서는 말 한마디 하기도 조심스러워요.

"How was your first lead audit?"라고 물어요. "Challenging but good learning experience"라고 교과서적인 대답. 파트너가 웃으면서 "Your work is very thorough"라고. 꼼꼼하다는 칭찬인가?

"But you need to be more efficient"라고 덧붙여요. 맞아요. 한국에서 하던 대로 너무 디테일하게 했어요. 여기는 materiality 이하는 과감하게 스킵하더라고요. 한국은 1원까지 맞춰야 하는데.

사인오프 날. 처음으로 제 이름이 lead auditor로 들어간 감사보고서. "Audit conducted by [my name], CPA"라고 써있는 걸 보니까 뭔가 뿌듯했어요. 비록 작은 회사지만, 미국에서 인정받은 기분.

팀 회식 갔어요. 신입 스태프들이 "You did great for your first lead"라고. 정말? 나 잘했어? "I learned a lot from you"라고 한 스태프가 말하는데, 뭘 배웠다는 건지. 실수만 한 것 같은데.

집에 와서 남편한테 자랑했어요. "나 첫 감사 사인오프 했어!" 남편이 "그게 뭔데?"라고 물어요.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중요한 거야"라고 했죠.

다음 날 매니저가 "Ready for the next one?"이라고 물어요. 다음 클라이언트는 더 크대요. 연 매출 2억 불. 벌써 겁나지만 "Yes"라고 대답했어요.

1년 전만 해도 미국 감사가 뭔지도 몰랐는데, 이제 리드 오디터예요.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조금씩 배워가고 있어요. 영어도, 미국 회계 기준도, 문화도.

한국 회계법인 동기가 매니저 승진했다고 연락 왔어요.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씁쓸했어요. 나도 한국에 있었으면 매니저, 어쩌면 파트너 트랙에 있었을 텐데. 여기서는 이제 겨우 첫 감사 끝낸 주니어.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적어도 아직은. 새로운 걸 배우고 있고, 성장하고 있으니까. 40대에 다시 주니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가끔은.

오늘도 새로운 클라이언트 자료 검토하고 있어요. 이번엔 IT 회사. 또 처음부터 배워야 해요. Software revenue recognition이 뭔지, SaaS가 뭔지. 구글링하면서, 하나씩 배우면서.

언젠가는 여기서도 시니어 매니저가 되겠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때까지는 계속 배우고, 실수하고, 또 배우는 거예요. 그게 이민자의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