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더니 "우리 병원 옆 건물에 있던 그 의료기기 회사 있잖아, 싱가포르로 본사 옮긴대" 하는 거예요.
저는 처음엔 별생각 없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세금 때문이래. 한국이 25%인데 싱가포르는 17%라고" 하니까 갑자기 회계사 본능이 발동하더라고요. 아니, 겨우 8%포인트 차이 때문에 회사를 통째로 옮긴다고?
그 회사 CFO를 우연히 세미나에서 만났는데, 진짜 이유를 들으니 좀 복잡하더라고요. 외국계 투자사가 "한국 법인세 때문에 투자수익률이 3%포인트나 떨어진다. 싱가포르로 옮기면 투자금 두 배로 늘려주겠다"고 했대요. 500억을 1,000억으로요. 누가 안 옮기겠어요?
근데 웃긴 건, 그 회사가 떠나고 나서 벌어진 일이에요. 남편이 그러는데 한국에서 임상 데이터 못 구해서 신약 허가가 6개월이나 늦어졌대요. 세금 아낀다고 좋아했는데, 시장 진입이 늦어져서 결국 손해 본 거죠.
제가 회계 일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사람들이 세율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메드트로닉이라고 아세요? 미국 의료기기 대기업인데, 2015년에 아일랜드로 본사 옮겼어요. 미국이 35%, 아일랜드가 12.5%니까 엄청난 차이죠. 연간 5,000억 원 정도 세금을 아꼈대요.
그 돈으로 뭘 했는지 아세요? 전부 R&D에 쏟아부었어요. AI 심장박동기, 차세대 인슐린 펌프... 신제품이 쏟아져 나왔죠. 세금 절감이 곧 경쟁력이 된 거예요.
그런데 한국 상황은 좀 달라요. 제가 최근에 바이오텍 스타트업 세무 컨설팅을 했는데, 이 회사가 고민이 많더라고요. 싱가포르로 가면 세금은 연 80억 원 정도 아낄 수 있는데, 한국 정부 R&D 지원금 300억 원을 포기해야 한대요.
계산해보니까 오히려 한국에 있는 게 나았어요. 왜냐고요? 한국은 신약 개발하면 세액공제를 50%까지 해줘요. 명목세율은 25%지만 실제로는 18% 정도밖에 안 내거든요. 싱가포르는 17%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8%까지 떨어뜨릴 수 있고요. 차이가 크긴 한데, 지원금까지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지는 거죠.
남편이 작년에 투자 유치 미팅에 갔다가 들은 얘긴데, 외국계 PE 매니저가 대놓고 이렇게 말했대요. "한국 법인세 때문에 IRR이 3%포인트 낮아집니다. 싱가포르로 본사 이전하면 투자금 2배로 넣을 수 있습니다."
그 회사는 결국 싱가포르로 갔어요. 투자금도 받고, 글로벌 파트너십도 맺고... 처음엔 잘 나가는 것 같았죠. 그런데 1년 지나니까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한국 건강보험 수가 협상할 때 외국 기업 취급받아서 불리했대요. 국내 병원들도 "외국 회사"라고 거리를 두고요.
반대로 한국에 남은 경쟁사는 어땠을까요? 투자금은 적게 받았지만, 정부 과제 300억 원 따고, 건보 등재도 빨리 되고, 국내 병원들과 협력도 잘됐어요. 지금은 오히려 이쪽이 더 잘 나가요.
제가 요즘 관심 있게 보는 게 2025년부터 시작되는 글로벌 최저한세예요. OECD에서 만든 건데, 어디로 본사를 옮기든 최소 15%는 내야 한대요. 조세회피처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이렇게 되면 뭐가 바뀔까요? 단순히 세금 아끼려고 본사 옮기는 건 의미가 없어져요. 대신 R&D 지원이나 시장 접근성이 더 중요해지겠죠. 한국이 오히려 유리해질 수도 있어요.
남편이 가끔 이런 말을 해요. "의료는 환자가 있는 곳에서 해야 해. 데이터도 있고, 임상도 할 수 있고. 세금 몇 푼 아낀다고 그걸 포기하는 건 바보짓이야."
맞는 말이에요. 제가 회계사지만, 숫자만 보고 결정하면 안 된다는 걸 요즘 많이 느껴요. 특히 의료 분야는 더 그래요. 환자 데이터, 의료진과의 협력, 정부 지원, 보험 시장... 이런 게 세금보다 훨씬 중요할 때가 많거든요.
얼마 전에 글로벌 제약회사 한국 지사장을 만났는데, 이분이 그러더라고요. "우리가 한국에 R&D 센터 만드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세금 때문이 아니에요. 한국 의료 수준이 높고, 임상시험 속도가 빠르고, 정부 지원도 좋거든요."
실제로 노바티스, 로슈 같은 회사들이 한국에 연구소를 늘리고 있어요. 세율은 스위스가 훨씬 낮은데도요.
요즘 제가 컨설팅할 때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세율만 보지 마세요. 세액공제 얼마나 받을 수 있는지, 정부 지원은 뭐가 있는지, 시장 접근은 어떤지 다 봐야 해요."
작년에 상담했던 스타트업 대표가 최근에 연락 왔어요. "싱가포르 안 가길 잘했어요. 경쟁사는 세금은 아꼈는데 한국 시장 진입이 안 돼서 고생하고 있대요."
세금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의료 산업에서는 세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특히 한국처럼 건강보험 시스템이 강력한 나라에서는 더 그래요.
남편이 어제 저녁에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앞으로는 세율 경쟁이 아니라 지원 경쟁 시대가 될 거야."
저도 동감해요. 단순히 세금 낮춘다고 기업이 오는 시대는 끝났어요. 이제는 R&D 지원, 시장 접근성, 규제 환경... 이런 걸로 경쟁하는 시대가 왔죠. 한국이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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