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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아내

3개월 여름방학 생존기

by 연우아빠45 2025. 8. 12.

큰애가 학교 끝나고 온 날, 배낭에서 종이 한 장 꺼내더니 "엄마, 방학이래"라고 했어요. 6 7일부터 8 28일까지. 잠깐, 이게 맞나? 다시 봤어요. 진짜 3개월이더라고요.

한국에서는 방학이면 학원 스케줄 짜느라 바빴는데, 여기는 학원이라는 게 없어요. 아니, 있긴 한데 한인타운까지 차로 40. 매일 왕복 1시간 반을 운전할 순 없잖아요. 그럼 뭘 하지?

캠프 검색하다가 현실 자각했어요. YMCA 수영 캠프 일주일에 450, 코딩 캠프는 700, 테니스 캠프는... 보다가 그냥 껐어요. 애 둘이면 한 달에 월급이 다 날아가는 수준이더라고요. 남편한테 보여줬더니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라고 하길래, 찾아봤죠. 캘리포니아 주법. 12살 이하 아동 단독 재택 금지. 벌금이 어마어마하대요.

고민 끝에 타협안. 오전에만 YMCA 캠프, 오후는 큰애가 동생 봐주기. 큰애한테 얘기했더니 표정이... "나도 애야"라고 항의하더라고요. 맞는 말인데 어쩌겠어요. 50불 용돈으로 협상 타결. 10살이 7살 보는 거, 불안했지만 매일 점심시간에 전화해서 확인하기로 했죠.

방학 첫 주, 월요일 오전 11시쯤 회사에서 전화 왔어요. 큰애가 울면서 "동생이 시리얼 우유를 카펫에 쏟았어"라고. 화상통화로 상황 파악하고, 닦는 법 알려주고. 매니저 눈치 보면서 화장실에서 통화했네요.

수요일엔 전자레인지 사용법 몰라서 전화. 금요일엔 "집에 무서운 사람이 벨 눌렀어"라고. 택배였어요. 이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앞으로 11주가 더 남았다는 게 막막했어요.

7 4일이 다가오니까 회사 사람들이 다들 "Any plans for the 4th?"라고 물어요. 플랜이 있어야 정상인가 봐요. 그냥 집에서 쉴 거라고 했더니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더라고요.

결국 불꽃놀이 보러 갔죠. Manhattan Beach 근처 공원. 오후 4시부터 자리 잡으러 가야 한대서 돗자리 들고 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 겨우 자리 잡고 앉았는데 옆 가족이 말 걸어요. "First time?"이라고. 티가 났나 봐요.

해 지고 불꽃놀이 시작했는데, 폭죽 소리에 작은애가 제 품에 파고들었어요. "무서워"라고 한국말로. 주변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뭐 어쩌겠어요. 꼭 안아주면서 "괜찮아, 예쁜 거야"라고 달랬죠. 근데 저도 좀 무서웠어요. 소리가 너무 커서.

남편 병원 BBQ 파티 날. 뭐 입고 갈지 한 시간 고민했어요. 너무 차려입으면 이상하고, 너무 캐주얼하면 또 이상하고. 결국 그냥 청바지에 흰 셔츠. 무난하게.

포트럭이라고 해서 뭘 가져가나 고민하다가 코스트코 쿠키. 한국 같으면 과일 깎아 갔을 텐데, 여기서 수박 깎아가면 이상하게 본대요. 누가 그랬어요. 한국 엄마가 수박 깎아왔다가 다들 "와우"했다고. 좋은 와우가 아니라 신기한 와우.

파티 가니까 다들 알아서 막 대화하고 있는데, 저는 누구한테 말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남편은 동료들이랑 얘기하느라 바쁘고. 혼자 음료수 테이블 앞에서 서성거렸어요.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막 얘기하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냥 웃으면서 "Yeah, yeah"했더니 계속 뭘 물어봐요. 나중에 남편한테 물어보니 우리 애들 학교 어떠냐고, 적응 잘하냐고 물어본 거래요. ,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8월 되니까 타겟이랑 월마트에 Back to School 섹션이 생겼어요. 학용품 리스트 들고 갔는데, 이상한 것들이 많아요. 티슈 3박스, 손 세정제 2, 지퍼백 대형 2박스, 소형 2박스... 이게 왜 학용품이지? 알고 보니 교실에서 공동으로 쓰는 거래요. 한국은 학교에서 다 준비하는데.

카트에 담다 보니 100불 훌쩍. 크레용도 Crayola 24색 지정, 연필도 Ticonderoga 브랜드 지정. 왜 브랜드까지 지정하는지. 그냥 다 샀어요. 애들이 혼자 튀면 안 되니까.

8월 중순쯤, 큰애가 소파에 누워있길래 "뭐 해?"라고 물었더니 "Being bored"라고. 보드 한다는 게 뭔가 했더니 심심하다는 뜻이래요. 그것도 동사로 쓴다고. 영어는 이런 건 빨리 배우네요.

에어컨 고장 난 날은 정말... 아침에 일어났는데 집이 찜통이에요. 8 LA 낮 기온 38. 집주인한테 문자 보냈더니 "I'll look into it"이라는 답장. look into it이 뭔 뜻인지 몰라서 사전 찾아봤어요. 알아본다는 뜻. 언제?

이틀 뒤에 수리공 왔어요. 10분 보더니 부품 주문해야 한대요. 3. 5일 동안 선풍기 4대 돌리면서 살았어요. 애들이 "한국 집은 시원했는데"라고 투덜대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LA는 에어컨 없으면 못 살아요. 근데 집주인은 느긋해요. 한국 같으면 난리 났을 텐데. 문화 차이인가, 아니면 우리가 을이라서 그런가.

한인마트에서 장 보다가 비슷한 처지 엄마들 만났어요. 다들 방학 때문에 죽겠다고. 한 분은 "우리 애는 하루 종일 유튜브만 봐요"라고 하시고, 다른 분은 "전 그냥 포기했어요"라고. 위로가 되면서도 씁쓸했어요.

학교 시작 일주일 전, 오리엔테이션 갔어요. 새 교실, 새 선생님. 큰애 선생님이 저한테 와서 "Your son improved so much!"라고 하시는데, 진짜? 집에서는 맨날 한국 가고 싶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보여준 큰애 작문 과제물. 문법은 엉망이지만 쓰긴 썼더라고요. "My Summer Was Boring But Also Fun"이라는 제목. 모순적이지만 정확한 표현이었어요.

방학 마지막 주말, 바닷가 갔어요. 이제 주차할 곳도 알고, 좋은 자리도 알아요. 애들이 물에서 놀 동안 저는 그늘에 앉아서 멍하니 바다 봤어요.

3개월. 진짜 길었어요. 돈도 많이 들었고, 스트레스도 많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애들이랑 이렇게 긴 시간 보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불가능했을 시간. 힘들었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달까.

개학 전날 밤, 큰애가 "엄마, 나 사실 학교 가는 게 좀 기대돼"라고 했어요. 깜짝 놀랐죠. "친구 만나고 싶어?"라고 물었더니 "그냥...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라고.

3개월 생존 완료. 내년 여름이 벌써 겁나지만, 그때는 좀 더 나아지겠죠. 영어도 늘고, 캠프 정보도 더 알게 되고. 무엇보다 애들이 더 크면 혼자서도 잘 지내겠죠. 그러길 바라면서, 새 학기 준비나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