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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아내

시니어 매니저에서 신입으로

by 연우아빠45 2025. 8. 11.

"Your EAD card has been approved."

이메일 보고 소리 질렀어요. 진짜로. 애들이 "엄마 왜 그래?"라고 놀라서 뛰어왔을 정도로. 4개월 기다렸어요. 매일 USCIS 사이트 들어가서 케이스 상태 확인하고, 매일 실망하고. 근데 오늘 드디어. 취업 허가증이 나왔어요.

바로 회계법인에 이메일 보냈죠. 처음 오퍼 받았을 때 "EAD 나오면 연락드릴게요"라고 했었는데, 그 사이 4개월이나 지났으니 혹시 자리가 없어졌을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다음 날 답장 왔어요. "Great news! When can you start?" 눈물 날 뻔했어요.

출근 첫날 전날 밤, 잠이 안 왔어요. 옷 뭐 입지, 도시락은 싸가야 하나, 영어로 자기소개는 어떻게 하지. 남편이 "너 레지던트 1년 차 같아"라고 놀리더라고요. 맞아요. 한국에서 10년 경력이 여기서는 제로니까.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애들 도시락 싸고, 학교 보내고, 출근 준비했어요. 정장 입은 게 얼마 만인지. 거울 보니까 어색하더라고요. 큰애가 "엄마 예쁘다"라고 해줘서 힘 났어요.

회계법인까지 운전하는데 한 시간. LA 트래픽은 정말... 한국 강남 출퇴근 시간 저리 가라예요. 405 프리웨이 위에서 거의 서 있다시피 했어요. 라디오에서 "Sig-alert on 405"라고 하는데, 처음엔 그게 뭔지도 몰랐죠. 사고 났다는 뜻이래요. 맨날 사고 나요 여기.

사무실 들어갔는데 다들 바빠 보여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어요. HR 담당자가 와서 "Let me show you your desk"라고 하는데, 책상이 조그만해요. 한국 회계법인 시니어 자리만도 못한. 그래도 내 자리가 생겼다는 게 감사했어요.

첫 미팅 때 자기소개하는데 떨렸어요. "Hi, I'm... I was CPA in Korea... I mean, I am CPA..." 말이 꼬여서. 다들 웃으면서 "Welcome!"이라고 해주는데, 진짜 환영인지 예의상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점심시간에 혼자 먹었어요. 다들 자기들끼리 그룹 지어서 나가는데, 저한테는 아무도 안 물어봐요. 도시락 싸온 김밥 먹으면서 '한국에서는 내가 시니어 매니저였는데'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후에 매니저가 일 설명해주는데, 시스템이 완전 달라요. 한국에서 쓰던 프로그램이랑 하나도 안 똑같아요. "Do you understand?"라고 물어서 "Yes"라고 했는데, 사실 반도 못 알아들었어요. 구글링하면서 하나씩 배워야겠다 싶었죠.

퇴근하고 집에 오니 8. 애들이 "엄마 어디 있었어?"라고. 남편이 대충 먹인 흔적이 부엌에 가득. 컵라면 용기, 시리얼 그릇. "미안, 엄마가 이제 일해야 해서"라고 했더니 작은애가 "엄마 일 하지 마"라고.

둘째 주부터 조금씩 일이 늘었어요. 간단한 것부터. 인보이스 체크하고, 데이터 입력하고. 한국에서는 신입이나 하는 일들. 그래도 불평 못하죠. 여기서는 제가 신입이니까.

한국계 직원 한 명 있어요. 2세인데, 한국말 못해요. 그래도 "You're from Korea? My parents too!"라고 반가워하더라고요.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갔는데, 김치 싫어한대요. "Too spicy"라고. 한국 사람인데 김치를 싫어하다니.

월급날이 왔어요. 첫 월급. 한국에서 받던 것의 60%? 세금 떼고 나니 더 적어요. 그래도 내가 번 돈이라는 게 뿌듯했어요. 남편한테 "오늘 저녁 내가 산다"고 했죠. In-N-Out 버거 사줬어요. 애들이 "엄마 부자야?"라고 묻더라고요.

매니저가 어느 날 "Your work is very detailed"라고 칭찬했어요. 한국에서는 당연한 거였는데, 여기서는 특별한가 봐요. 조금씩 인정받는 기분. "Thank you"라고 했는데 속으로는 '나 원래 이것보다 훨씬 잘했어'라고 생각했어요.

큰애 학교에서 전화 왔어요. 일하는 중에. 애가 아프대요. 조퇴해야 한다고. 매니저한테 "I'm sorry, my son is sick"라고 하니까 "Go, family first"라고. 한국이었으면 눈치 엄청 봤을 텐데. 이런 건 여기가 낫네요.

병원 데려갔는데 의사가 뭐라고 설명하는데 의학 용어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남편한테 전화해서 통역 부탁했죠. 의사 남편 있어도 이럴 때는 무용지물. 옆에 없으면 소용없어요.

회계 시즌 시작됐어요. 야근이 늘었죠.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9, 10시 퇴근. 애들이 "엄마 맨날 늦어"라고 불평해요. 남편도 병원 일 바빠서 정신없고. 누가 애들 픽업하고 저녁 먹이고, 매일 전쟁이에요.

실수도 했어요. 큰 실수. 숫자 하나 잘못 입력해서 리포트 다시 해야 했어요. 매니저가 "It's okay, everyone makes mistakes"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실망했겠죠. 한국에서는 10년 동안 이런 실수 한 번도 안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났어요. '내가 왜 여기 있지?' 한국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인정받는 시니어 매니저였는데. 여기서는 그냥 영어 못하는 외국인 신입.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어요.

그래도 적응하고 있어요. 동료들이 "How was your weekend?"라고 물어봐 줘요. 처음엔 "Good"만 했는데, 이제는 "I went to beach with my kids"정도는 말해요. 스몰토크라는 거, 한국에서는 안 했는데 여기서는 중요하더라고요.

3개월 지나니까 좀 보여요. 일의 흐름이. 한국이랑 다르지만 회계는 회계더라고요. 숫자는 세계 공통어니까. 자신감이 조금씩 생겨요.

오늘 팀 회식 있었어요. 처음으로 초대받았어요. 멕시칸 레스토랑 갔는데, 메뉴 고르는 것도 일이네요. 다들 술 시키는데 저는 "Just water"라고 했죠. 운전해야 하니까. 한국에서는 회식 때 술 안 마시면 이상하게 봤는데, 여기는 아무도 신경 안 써요.

집에 오는 길에 생각했어요. 힘들지만 해내고 있다고. 느리지만 나아지고 있다고. 한국에서의 10년이 여기서 리셋됐지만, 다시 쌓아올리면 되는 거라고.

남편이 "수고했어"라고 해줬어요. "너도"라고 했죠. 우리 둘 다 여기서 새로 시작하는 거니까. 애들도 우리 보면서 배우겠죠. 포기하지 않는 거, 다시 시작하는 거.

내일도 출근해야 해요. 405 위에서 또 한 시간 서 있겠죠. 그래도 가야 해요. 내 자리가 있으니까. 작지만 내 책상이 있으니까. 언젠가는 여기서도 인정받는 회계사가 될 거예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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