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밤 11시쯤이었나, 남편이 갑자기 "우리 진짜 가는 거 맞지?"라고 물어봤어요. 병원에서 돌아와서 샤워하고 나온 직후였는데, 머리에 수건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이 왠지 애처로워 보이더라고요. 5년째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게.
저도 사실 확신이 없었어요. 회계법인 퇴사 서류 제출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은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낮에는 괜찮은데 밤만 되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어요.
우리 집 거실에 박스가 쌓이기 시작한 게 한 달 전부터예요. 처음엔 작은 박스 두세 개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거실 한쪽 벽면이 다 박스로 가려졌어요. 남편은 의학 서적들을 정리하다가 중간에 포기했고, 저는 회계 자료들을 버릴 건지 가져갈 건지 고민하다가 결국 다 들고 가기로 했죠. 미국에서 쓸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버리기엔 아까운 마음. 이런 게 미련인가 싶기도 하고.
친정엄마가 지난주에 오셨을 때 박스 더미를 보시더니 한숨을 푹 쉬셨어요. "너희 진짜 가는구나"라고 하시면서요.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우리가 그냥 말로만 그러는 줄 아셨대요. USMLE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USCPA 시험 본다고 했을 때도 "그래, 해봐라" 하시던 분이. 박스를 보니까 실감이 나셨나 봐요.
사실 저희도 처음엔 그냥 '해보자'였어요. 남편이 레지던트 3년차 때였나, 병원 당직실에서 새벽 3시에 전화가 왔었죠. "우리 미국 가볼까?" 뜬금없는 소리였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진지하게 들렸어요. 아마 그때 병원에서 뭔가 있었겠죠.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요. 그냥 "그래, 알아보자"라고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3년이 흘렀네요. 남편은 USMLE Step 1, 2, 3를 다 통과했고, 저는 USCPA 네 과목을 작년에 마무리했어요. 시험 준비하면서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었죠. 주말 부부라는 말이 우리 얘기였어요. 남편은 병원 일 끝나고 독서실 가고, 저는 회계법인에서 야근하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오고. 가끔 현관에서 마주칠 때면 "아, 살아있었네?" 하면서 웃곤 했어요.
부동산 정리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작년에 겨우 대출 받아서 산 아파트인데, 1년도 안 살고 팔아야 한다니. 그것도 급매로. 처음 이사 왔을 때 남편이랑 벽지 고르면서 신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이보리색으로 할지 베이지색으로 할지 30분 동안 고민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그게 그렇게 중요했어요.
어제는 병원 동료들이 송별회를 해줬대요. 남편이 케이크 사진 보내줬는데, "Good Luck in USA!"라고 써있더라고요. 옆에 있던 간호사 선생님이 "선생님 없으면 우리 어떡해요"라고 했다는데, 남편이 그 얘기하면서 눈가가 좀 빨개지더라고요. 5년 동안 정들었을 텐데. 환자들한테 인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예요.
저도 회계법인에서 마지막 인수인계 하면서 묘한 기분이었어요. 제가 담당했던 클라이언트들 파일 정리하면서, '이 회사 감사 처음 맡았을 때 정말 고생했는데', '이 대표님은 맨날 저한테 전화하셨는데' 이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후임한테 인수인계하면서 "이 대표님은 숫자에 예민하시니까 조심해야 돼"라고 말하는 제 모습이 왠지 서글펐어요.
오늘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남편이랑 얘기했어요. "우리가 미국 가서 잘할 수 있을까?" 남편이 물어봤죠. 솔직히 모르겠어요. USMLE 점수가 높다고 해서, USCPA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거기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는. 영어도 시험 영어랑 실제 생활 영어는 다를 테고, 문화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김치 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시시한 걱정부터 시작해서, 정말 그곳에서 의사로, 회계사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걱정까지.
그래도 가보기로 했어요. 여기서 계속 '만약에 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가서 부딪혀보고 안 되면 다시 돌아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부모님들은 걱정하시지만, 또 은근히 응원도 해주시고. 시어머니는 "너희가 잘 결정했어. 젊을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니"라고 하셨어요.
짐 싸면서 버릴 것도 참 많았어요. 레지던트 시절 남편이 입던 낡은 가운, 제가 회계사 시험 준비하면서 쓰던 형광펜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찍은 사진들... 아, 그 사진 얘기하니까 생각났는데, 남편이랑 처음 만난 게 병원 세미나에서였어요. 저는 병원 회계 감사 때문에 갔었고, 남편은 인턴이어서 세미나 준비하느라 정신없었죠. 커피 쏟을 뻔한 걸 제가 잡아줬는데, 그때 "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얼굴 빨개지던 모습이 귀여웠어요.
이제 일주일 후면 비행기를 타요. 편도 티켓이에요. 언제 돌아올지 정하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1년 후일 수도 있고, 10년 후일 수도 있고, 아예 안 돌아올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상하게 무섭다기보다는 설레요. 남편도 어제 밤에 "무서운데 기대도 된다"고 했거든요.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뭘 해야 할까요. 친구들 만나고, 좋아하는 음식점 가고, 한강 산책도 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갑자기 특별하게 느껴지네요. 매일 지나던 출근길도, 자주 가던 카페도, 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쉬워요.
남편이 아까 "우리 미국 가서도 블로그 계속 쓰자"고 했어요. 거기서 어떻게 적응하는지, 뭘 먹고 사는지, 병원은 어떤지, 회계법인은 어떤지. 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대요.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나중에 돌아봤을 때, '우리가 이런 용기를 냈었구나' 하고 기억할 수 있게요.
박스 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거실에서 나네요. 남편이 또 짐 싸나 봐요. 저도 가서 도와줘야겠어요. 미국 갈 준비, 아직 할 게 산더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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