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봄이었나... 아니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하여튼 더운 날이었어요.
"선생님, 제 얘기 듣고 계신 거 맞죠?"
50대 여성 환자분이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제가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였죠.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고개는 모니터에 박혀 있었고, 환자분 얼굴은 진료 시작한 지 5분이 넘었는데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순간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의사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더라고요.
사실 저희 의사들은 다 비슷해요. 환자 한 명 볼 때마다 차트에 기록해야 할 게 산더미거든요. 주소, 현병력, 과거력, 가족력, 약물 알레르기, 검사 결과, 처방... 타이핑하다 보면 진료 시간의 절반은 그냥 날아갑니다. 하루에 환자를 40명 정도 보는데, 계산해보니까 타이핑만 2시간 넘게 하고 있더라고요.
그날 저녁에 아내한테 이 얘기를 했어요. 아내가 회계사거든요. 일하는 스타일이 저랑은 완전히 달라서 가끔 조언을 구하곤 해요.
"음성인식 써보는 건 어때?"
아내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네 회사에서도 회의록 작성할 때 쓴다고. 근데 병원은 좀 달라요. 진료실에는 에어컨 소리, 복도 소음, 간호사들 말소리... 온갖 잡음이 다 들어오거든요. 게다가 의학용어는 일반 음성인식이 제대로 못 알아듣고요.
그래도 뭔가 해야겠다 싶어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좋은 마이크만 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착각이었어요.
일단 진료실 환경부터 바꿔야 했습니다. 벽에 흡음재를 붙였어요. 평당 3만원 정도 들었는데, 우리 진료실이 작아서 30만원 정도 나왔던 것 같아요. 그다음에 마이크를 샀는데, 이게 또 고민이더라고요. 너무 싸면 소리를 못 잡고, 너무 비싸면... 아내한테 혼날 것 같고.
결국 RODE PodMic이라는 걸 15만원 주고 샀습니다. 지향성 마이크라고 해서 제 목소리만 딱 잡아낸다고 하더라고요. 설치하고 나서 테스트해봤는데, 확실히 다르긴 했어요. 근데 에어컨 소리가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그때 우연히 NVIDIA RTX Voice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습니다. 무료더라고요. AI가 배경 소음을 없애준다는데, 반신반의하면서 깔았죠. 이게 진짜 신기했어요. 에어컨 소리는 싹 사라지고 제 목소리만 남더라고요.
음성인식 프로그램은 Dragon Medical One을 썼습니다. 월 8만원인데, 처음엔 좀 비싸다 싶었어요. 근데 이게 의료용이라 의학용어를 다 알아듣더라고요.
제가 "HTN 있으신 분이고요"라고 말하면 자동으로 "고혈압이 있으신 분이고요"로 바뀌어서 입력돼요. 이런 용어를 3,000개 정도 등록해놨더니, 이제는 거의 완벽하게 알아듣습니다.
속도 차이가 정말 컸어요. 예전에는 1분에 40자 정도 타이핑했는데, 말로 하니까 180자는 거뜬히 넘더라고요. 4배 이상 빨라진 거죠.
근데 여기서 법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환자 목소리가 녹음될 수 있잖아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좀 걱정됐는데, 변호사한테 물어보니 음성을 즉시 텍스트로 변환하고 원본은 바로 삭제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환자분들한테 동의서도 받고, 모든 처리를 병원 컴퓨터 안에서만 하도록 세팅했습니다.
아내가 또 하나 팁을 줬는데, 이런 장비들을 살 때 150만원 이하로 나눠서 사라는 거였어요. 그러면 감가상각 안 하고 바로 비용처리 할 수 있다고. 세금 아끼는 거죠. 회계사 아내 둔 덕을 봤네요.
이렇게 시스템을 바꾸고 나서 정말 많은 게 달라졌어요. 일단 제가 환자를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말 그대로 '볼 수 있게' 된 거예요.
어제도 당뇨 환자분이 오셨는데, 약 부작용 얘기하시면서 표정이 좀 어두워지시더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타이핑하느라 못 봤을 텐데, 이제는 바로 알아채고 "많이 힘드셨죠?"라고 물을 수 있었어요. 그 환자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선생님, 오늘은 참 편하게 얘기했네요."
돈으로 계산해보니까 효과가 꽤 컸어요. 시간이 절약되니까 하루에 환자를 10명 정도 더 볼 수 있게 됐거든요. 월 500만원 정도 수익이 늘었으니, 투자비 200만원은 2주 만에 회수한 셈이죠.
근데 진짜 중요한 건 돈이 아니었어요. 환자분들이 "선생님이 제 얘기를 정말 들어주시는구나" 하고 느끼시는 게 보여요. 만족도 조사 점수도 4.2점에서 5.5점으로 올랐고요.
가끔 생각해요. 그때 그 환자분이 "제 얘기 듣고 계신 거 맞죠?"라고 안 물으셨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도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겠죠.
의사가 환자를 본다는 게 뭘까요? 병만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을 봐야 하는 건데, 저는 모니터만 보고 있었던 거예요. 음성인식이라는 기술이 제게 준 건 시간이 아니라, 환자와 눈 맞출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요즘도 가끔 옛날 방식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타이핑하는 동안은 생각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말하면서 동시에 생각해야 해서 처음엔 좀 힘들었어요. 근데 이제는 익숙해졌고, 무엇보다 환자분들 표정에서 "이 의사는 내 얘기를 듣고 있구나"라는 안도감이 보일 때, 이 선택이 옳았다는 걸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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