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가 물어요. "오늘은 뭐 했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병원에 있었는데, 정확히 뭘 했는지 설명하기가 애매해요. 한국에서는 환자 보고, 수술하고, 처방하고, 명확했는데. 여기서는... 그냥 따라다녔어요. 11시간 동안.
펠로우십이라는 게 이런 거더라고요. 의사인데 의사가 아닌. 배우는 사람인데 또 일도 해야 하는. 한국에서 10년차 소화기내과 전문의였는데, 여기서는 그냥 펠로우. Dr. Kim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실제로는 레지던트보다 조금 나은 수준?
첫 주, 오리엔테이션 때 충격받았어요. 다른 펠로우들 보니까 다들 20대 후반, 30대 초반. 저만 40대. 인도에서 온 친구가 "You look experienced"라고 하는데, 경험 많아 보인다는 게 칭찬인지 나이 들어 보인다는 건지.
EMR 시스템, 완전히 달라요. 한국에서는 클릭 몇 번이면 끝나는 게 여기서는 왜 이렇게 복잡한지. 처방 하나 내는데 스크린을 다섯 개나 거쳐야 해요. 실수로 엉뚱한 환자 차트에 기록한 날, 어텐딩이 "It happens"라고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회진 도는 게 제일 힘들어요. 어텐딩이 설명하는데 의학 용어는 알겠는데, 그 사이사이 농담이나 관용구는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다들 웃는데 저만 멍하니. 나중에 인도 친구한테 물어보면 "아, 그거 미드에 나오는 표현이야"라고.
환자 면담이 진짜 문제예요. 한국에서는 "어디 아프세요?" "여기요" "약 처방해드릴게요" 끝. 여기는 환자가 자기 인생 스토리를 다 얘기해요. 15분 잡힌 면담 시간에 10분은 날씨 얘기, 가족 얘기. 그리고 "Doc, what do you think?"라고 물어보면, 영어로 설명해야 하는데...
첫 달에 환자 한 명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어서 "Korea"라고 했더니 "North or South?"라고. 또 이 질문. "South"라고 하니까 "Oh, my TV is Samsung!"이라고. 네, 그렇군요. 삼성 TV 좋죠. 근데 지금 당신 위내시경 결과 설명해야 하는데.
콜 당직 첫날 밤. 한국에서는 전공의들이 일차적으로 다 처리하고 필요할 때만 불렀는데, 여기는 간호사가 직접 전화해요. 새벽 2시, "Doctor, patient in room 203 wants to talk to you about his pain medication." 진통제 얘기하려고 새벽 2시에? 일어나서 갔죠.
복도에서 어텐딩 만났는데 "How's your fellowship going?"이라고 물어요. "Good"이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버티는 거죠.
점심시간이 있다는 게 신기해요. 한국에서는 김밥 한 줄 서서 먹거나, 컵라면 먹으면서 차트 정리했는데. 여기는 정확히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 처음엔 이 시간에 뭘 해야 하나 어색했어요. 카페테리아 가서 샌드위치 사 먹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올라왔죠.
케이스 발표할 때가 고역이에요. 한국어로는 술술 나올 텐데, 영어로 하려니 "The patient was... had... presented with..."이러면서 더듬거려요. 다들 참고 들어주는데, 답답한 건 저예요. 10년 경력이 이렇게 무색할 줄이야.
한국 환자 한 명 왔어요. 할머니인데, 영어 못하신대요. 어텐딩이 "Dr. Kim, can you help?"라고. 드디어 제 차례다 싶었죠. 한국말로 증상 들으니까 바로 이해되고, 설명도 술술. 할머니가 "한국 의사 선생님 만나니까 너무 좋네"라고 우시는데, 저도 울컥했어요.
그런데 다시 어텐딩한테 영어로 통역해서 설명해야 하는데, 이게 또 쉽지 않아요. "환자분이 명치 끝이 더부룩하고 체한 것 같다고 하시는데..."를 영어로 어떻게 설명하죠? "She feels... bloated? Indigestion?"
월급 명세서 볼 때마다 한숨 나와요. 한국 대학병원 봉직의 월급의 3분의 1? 아내가 "괜찮아, 펠로우십 끝나면 나아질 거야"라고 위로하는데. 2년. 2년만 버티면 정말 나아질까요?
그래도 배우는 건 있어요. 미국 의료 시스템, 보험 체계, 환자 응대 방식. 한국과는 완전히 달라요. 환자 중심이라고 해야 하나. 의사가 갑이 아니에요. 오히려 서비스업 같은 느낌?
어텐딩 중에 한국계 2세 의사가 있어요. Dr. Park. 한국말은 못하는데, 가끔 저한테 "Everything okay?"라고 물어봐 줘요. 지난주에는 "It gets better"라고 했어요. 정말 나아질까요?
오늘 처음으로 solitary하게 환자 봤어요.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도 더듬거렸고, 차트 작성도 오래 걸렸지만, 해냈어요. 어텐딩이 "Good job"이라고 했을 때, 레지던트 1년차 때처럼 뿌듯했어요.
집에 와서 아내한테 얘기했어요. "오늘 혼자 환자 봤어." 아내가 "당연한 거 아니야? 10년차 의사가"라고 하더라고요. 맞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것도 성취예요.
내일은 케이스 컨퍼런스. 발표 준비해야 해요. 파워포인트는 다 만들었는데, 영어로 설명하는 연습을 해야죠. 거울 보고 연습하는 40대 의사. 우스꽝스럽지만, 이게 현실이에요.
가끔 한국 동기들 SNS 보면 교수 됐다, 개원했다, 학회 발표했다. 부럽기도 하고,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선택한 길이니까. 2년 후에는 저도 미국에서 제대로 된 의사가 되어 있겠죠?
아내가 옆에서 "일기 쓰는 거야?"라고 물어요.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이라고 대답했어요. 매일이 도전인 펠로우 생활.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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