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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남편

새벽 3시, 심근경색 할머니가 병실에서 쫓겨난 진짜 이유

by 연우아빠45 2025. 7. 18.

작년 12월 23일 새벽 2시 47분이었어요. 심전도 모니터가 급하게 울리는 소리에 당직실에서 뛰쳐나왔죠. 78세 김모 할머니가 ST분절 상승 심근경색으로 실려오신 상태였고,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위급한 상황이었어요. 심도자실 준비를 마치고 501호 입원 수속까지 다 끝냈는데, 갑자기 병원장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지금 곧 도착하는 분이 있는데, 501호로 안내해야겠네."

새벽 3시 15분, 할머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인실로 옮겨지셨어요.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검은색 제네시스에서 내린 중년 여성이 501호로 들어갔죠. 차트에 적힌 주 증상은 그저 '상복부 불편감'이었어요.

의대 본과 3학년 때 첫 병원 실습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의료는 정말 숭고한 것이라고 믿었어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우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하지만 인턴이 되고, 레지던트를 거쳐 스태프가 되기까지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알게 됐어요. 병원에도 계급이 있고, 환자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걸요.

처음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인턴 2개월 차였던 것 같아요. 간경화 말기 환자분이 간성혼수로 중환자실 입실을 기다리고 계셨는데, 갑자기 병동 과장이 찾아와서 귓속말을 하더라고요. "저 환자 일반 병동으로 옮겨. 지금 중요한 분이 오신대."

그 '중요한 분'은 건강검진에서 간수치가 살짝 높게 나온 모 건설사 회장이었어요. 예방 차원의 입원이었는데도 중환자실 특실에서 일주일을 머무르셨죠.

우리 병원 5층 서쪽 복도는 좀 특별해요. 일반 병동과는 달리 카펫이 깔려 있고 조명도 은은하게 되어 있죠. 복도 끝에는 보안 요원이 24시간 상주하고 있어요. 그곳의 10개 병실은 병원 전산에 항상 '입원 중'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비어있는 날이 더 많아요. 언제든 '그들'이 올 수 있도록 준비된 공간이거든요.

한번은 야간 당직 중에 그곳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는데, 일반 병실과는 정말 차원이 달랐어요.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스위트룸 구조에 간병인용 별도 침대, 최신형 의료기기들이 갖춰져 있었죠. 화장실엔 비데와 안마 기능이 있는 좌변기, 이탈리아산 타일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유명 화가의 진품이 걸려 있었어요. 냉장고엔 수입 생수와 유기농 과일이 가득했고요. "여기가 병실 맞아?" 동기가 중얼거렸는데, 저도 할 말이 없었어요.

VIP 환자는 차트에 특별한 표시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다 알죠. 일단 입원 경로부터 달라요. 일반 환자는 외래 진료 후 입원 수속을 밟지만, 그들은 병원장실이나 진료부장실을 통해서 바로 입원하거든요. 회진 시간도 따로 잡혀요. 교수님이 직접 하루에 두세 번씩 들르시고, 전공의는 30분마다 상태를 체크해야 해요.

간호사들 사이에도 암묵적인 규칙이 있더라고요. VIP 병동 근무는 자원제인데, 한 번 배치되면 다른 병동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간호사를 바꾸면 컴플레인이 들어오거든요.

중견 회계법인에서 병원 전문 회계사로 일하는 아내가 어느 날 저녁에 한숨을 쉬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오늘 감사하던 병원 재무제표 봤는데, 정말 충격적이더라." 아내가 발견한 건 교묘한 이중 청구 시스템이었어요.

일반 환자가 MRI를 찍으면 60만원이 청구되는데, 동일한 MRI 검사가 VIP 환자에겐 200만원으로 청구되고 있었대요. 차액인 140만원은 '의료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처리됐고요. 더 놀라운 건 이 기금이 기부금으로 분류되어서 연말정산 때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실질적으로는 의료비인데 기부금으로 둔갑시켜서 더 큰 세제 혜택을 주는 거죠.

"이게 합법이야?" 제가 물었더니 아내가 말했어요. "회색지대지.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은 없거든."

작년 5월에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어요. 교통사고로 대량 출혈 환자가 실려왔는데, B형 RH- 희귀 혈액형이었어요. 병원 혈액은행에 재고가 3팩뿐이었는데, 2팩은 '예약'되어 있었죠. 알고 보니 같은 혈액형인 모 그룹 회장이 다음 주 정기 검진을 앞두고 있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혈액을 확보해둔 거였어요.

"환자가 죽게 생겼는데 예약이 뭔 소용이야!" 흥분한 응급의학과 교수가 소리쳤지만, 병원 행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인근 병원들에 다급하게 연락해서 혈액을 수급받았는데, 시간은 2시간이나 지체됐고 환자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중환자실에서 3주를 보내야 했어요. 만약 그 2팩을 바로 수혈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VIP 진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보상이 따라요. 월말 수당 명세서에 '특별수당'이라는 항목으로 30-50만원이 추가되고, 연말에는 '우수 의료진'으로 선정되어서 해외 학회 참가 기회도 주어지죠. 무엇보다 병원 내 입지가 탄탄해져요.

반대로 VIP 진료를 소홀히 하면 은근한 불이익이 따르죠. 작년에 한 후배가 VIP 환자의 불필요한 검사 요구를 거절했다가 곤욕을 치렀어요. 형식적인 사유로 지방 분원 발령이 났고, 결국 6개월 만에 사직했죠. "의사라면 의학적 소신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마지막 날 후배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아요.

VIP 특혜의 그림자는 일반 환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돼요. 우리 병원 MRI 평균 대기일은 3주인데, VIP는 당일 촬영이 가능해요. 어떻게 그럴까요? 일반 환자 예약 사이사이에 '긴급 슬롯'이라는 명목으로 시간을 비워두기 때문이죠.

수술실도 마찬가지예요. 정규 수술 스케줄은 6개월 전부터 잡히지만, VIP 수술은 일주일 전 통보로도 가능해요. 그럴 때마다 일반 환자의 수술이 연기되죠. '의료진 일정 조정', '장비 점검' 등의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요. 한 통계를 봤는데, 우리 병원에서 수술 연기를 경험한 환자의 87%가 건강보험 환자였어요. 과연 우연일까요?

며칠 전에 오랜만에 의대 동기들을 만났어요. 누군가 물었죠. "너희 병원도 VIP 병동 있지?" 다들 쓴웃음을 지었어요. 없는 곳이 없다는 듯이요. "우린 그래도 의사잖아.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한 친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어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개인이 시스템을 바꾸기엔 너무 거대하고 견고하죠.

하지만 적어도 침묵하지는 않기로 했어요. 이 글을 쓰는 것도 그 작은 시작이에요. 완벽한 평등은 불가능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최소한 생명 앞에서만큼은 평등해야 하지 않을까요? 응급실에서 대기 중인 심근경색 환자보다 복통을 호소하는 VIP가 우선일 수는 없어요. 수혈이 급한 환자보다 일주일 후 검진 예정인 회장님이 우선일 수는 없죠.

의료는 상품이 아니에요. 더 많이 낼수록 더 좋은 서비스를 받는 백화점이 아니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배웠고, 아직도 그렇게 믿고 싶어요.

내일도 저는 병원에 출근할 거예요. VIP 회진도 돌겠죠.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다짐해요. 침묵하지 않겠다고, 작은 목소리라도 계속 내겠다고요. 언젠가는 501호에서 쫓겨난 할머니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